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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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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개통
Scene 2. 월미도 대규모 위락시설 탄생
Scene 3.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 극복
이렇게 중요한 역, 완벽 소화한 인천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경인선 인천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출발지다. 1899년 릴짱릴게임 9월18일 아침 인천에서 떠난 여섯 량짜리 모갈(Mogul) 증기기관차가 오전 9시 10분 노량진에서 내외국인 승객 수백 명을 태우고 출발해 10시 40분께 인천역에 도착했다. 이날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내빈들은 식사를 마친 뒤 오후 1시 10분 열차로 떠나 2시 40분께 다시 영등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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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9월 18일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 /인천시립박물관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 개통식 ‘최초 타이틀’ 영광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서울까지 1시간 40분… 개항장 호텔들은 역사속으로
항만도시에 부여된 관광 이미지 ‘월미도유원지’ 성황
일제 횡포 온몸으로 받아낸 백성들의 쓰린 고통 간직
현재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으로 가면 안내판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철도’ 개통 순 야마토무료게임 간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감흥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27년 전 거대한 쇳덩이가 사람과 화물을 잔뜩 싣고 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철길을 달렸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의 충격을 오늘날 우리가 헤아리기는 어렵다. ‘최초의 철도’라는 역사 정도만 갖고 인천역을 찾는다면 소박한 역사(驛舍)의 모습에 십중팔구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다행 온라인야마토게임 히 우리는 그때의 인천역을 상상할 수 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편 소설 ‘철도원 삼대’(창비·2020)에서 경인철도 개통 이후 열차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 각종 자료를 응축해 주인공 이백만의 입을 빌려 이렇게 썼다.
“그게 말이야, 거시기니 쇳덩이가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가다니! 말도 자전거도, 인력거는 더욱이나 상대도 안 될 거다. 어찌나 빠르던지 고개를 숙였다 들어보니 순식간에 지나가선 다리가 텅 비어있더란 말이지.” (‘철도원 삼대’ 중에서)
이백만이 7년 전(1900년) 지어진 한강철교를 건너는 경인선 열차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강화도 소작농 집안 출신 이백만은 철도에 매료돼 경인철도 선반부에 예비 고원으로 입사한다. 이후 이백만의 삶은 경인선을 달린 증기기관차에 올라탄 것처럼 빠르게 근현대사를 질주한다. 1883년 제물포 개항과 개항장 조성으로 인천은 근대 문물을 만나게 된다. 개항 16년 후 철도가 뚫리면서 비로소 인천은 ‘근대’(Modern)라는 시대를 온몸으로 맞게 된다. 시간 개념부터 송두리째 바뀐다.
경인선 개통 전 인천에서 서울까지 약 100리 길을 가려면 말을 타거나 걸어야 했다. 꼬박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김상열 인천도시역사관장이 쓴 인천시 민속조사 보고서 ‘모든 것은 역에서 시작되었다’(국립민속박물관·2018)를 보면,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는 조선에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불렸으나, 매우 좁고 거칠었다. 조랑말의 등 양쪽으로 두 개의 짐을 얹거나 지게로 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개항기 인천 개항장 조계 일대에 스튜어드호텔, 조선호텔, 대불호텔 등 서양식 호텔이 성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천~서울 간 근대적 교통 수단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제물포항으로 당도하면 인천에서 꼭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개항장 호텔들은 경인선 개통 이후 인천~서울 간 이동 시간이 1시간 40분으로 단축되자 경영난을 겪다 서서히 문을 닫았다.
김상열 관장은 앞선 책에서 “배가 제물포항으로 지구상의 모든 물산을 집결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기차는 제물포에 있는 것을 경성을 비롯한 조선 각지로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경인선 개통 당시 승객들이 열차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 /인천시 제공
경인선이 인천~서울 간 거리만 좁힌 게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새벽닭 우는 소리, 해가 뜨고 지는 변화로 시간을 짐작하며 생활했다. 시간은 딱 맞아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이 적힌 열차 운행 시간표는 시간을 명확히 규정하고 통제했다. 김지환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가 쓴 ‘모던 철도’(책과함께·2022)를 보면, 1899년 9월 개통 당시 경인선은 매일 오전 7시 인천역에서 출발해 7시 6분 유현(현 동인천역), 7시 11분 우각동(현 도원역 인근), 7시 36분 부평, 7시 50분 소사, 8시 15분 오류동, 8시 40분 노량진 순으로 운행했다.
김지환 교수의 앞선 책에 따르면, 19세기 말 주한 미국 공사를 지내며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이 열린 인천 우각동 인근에 ‘알렌 별장’을 짓기도 한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기차는 양반이라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양반의 종이 요청하더라도 늑장부리지 않는다. 기차가 곧 훌륭한 교육자 역할을 하게 됐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국어 교과서에서도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규율을 철도를 통해 교육했다. 경성역 앞에 동경표준시를 가리키는 시계탑이 세워지면서, 한국인은 모든 일상을 그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됐다.
“원산을 우구려 가깝게 하고/ 근산에 뻗치어 멀게 하면서/ 우렁찬 기적을 울리는 철마/ 어언 듯 제물포에 다다랐도다”
‘경인철도가’(京仁鐵道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경인선 개통 이후 서울에서 인천까지 열차를 타며 느끼는 감정을 담았다. 근대적 문명의 속도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인천의 역사 속 음악을 발굴·고증하고 있는 음악단체 ‘인천 콘서트 챔버’가 이 곡을 되살려 2021년 발매한 음반 ‘인천근대양악열전’에 수록했다. 주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나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철도는 항만도시 인천에 ‘경인철도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관광도시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1905년 부산~서울 간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부산~서울을 연결하는 경로가 생겼고, 서울에서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까지 철도가 연결됐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접 운영하던 경인선은 191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위탁됐다. 일종의 민영화였다.
월미도 조탕 외부 모습. /인천시 서부공원사업소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인천역과 연계한 월미도 관광 개발에 나섰다. 인천역 인근에서 월미도까지 1㎞ 구간에 돌제(바다 밑 모래의 이동을 막기 위한 구조물)를 쌓아 도로를 만들었고, 인천역과 월미도를 오가는 셔틀(합승차)을 운행했다. 1922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월미도 북쪽 2천500평 부지에 르네상스식 2층 건물에 욕장을 갖춘 대규모 위락시설을 조성했다.
이듬해 지역 유지들이 모인 월미유원회사는 월미도 6천500평 부지를 인천부로부터 대여받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욕장보다 더 규모가 큰 실내 조탕, 야외 풀장과 해수욕장 등을 갖춘 위락시설을 만들었다. 동물원, 식물원도 생겨났다. 하루 3~6회 운행하던 경인선은 1924년 9회, 1929년 14회까지 운행 횟수를 늘렸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38~1939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박명’에는 인천역을 거쳐 가는 월미도 풍경이 자세히 담겼다.
“난간에서 바로 내려다뵈는 푸울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목욕도 하고 헤엄도 치는데, 특별히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서 목욕을 하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푸울의 얕은 편으로 몇 쌍의 청춘 남녀가 섞이어서 멱을 감는다고 하느니보다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박명’ 중에서)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 (‘철도원 삼대’ 중에서)
철도라는 근대의 양면성을 압축한 황석영의 문장이다. 1896년 조선 정부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받아 낸 미국인 사업가 모스(James Morse)는 공사 중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1899년 1월 일본이 설립한 경인철도 인수조합에 사업권을 완전히 넘겼다. 일본은 경인선을 비롯해 경부선, 경의선 등을 차례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민간인의 토지를 헐값에 수용해 일본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들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살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철도원 삼대’ 중에서)
황석영의 이 소설 속 문장은 실제로 자행된 역사다. 김지환 교수의 앞선 책을 보면, 경부선과 경의선이 부설되면서 약 2천만 평의 토지가 철도 부지로 수용됐고, 연인원 1억 명이 부설 노동자로 동원돼 강도 높은 노역에 시달렸다. 인천~서울 간 경인선 부설은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2024년 10월 허종식(민·인천 동구미추홀구갑) 국회의원실이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소장 자료인 ‘보스트웍 문건’ 속에서 발굴한 경인선 건설 현장 사진(2024년 10월 25일자 1·8면 보도)에서 당시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범 김구(1876~1949)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에 투옥됐을 때(1896~1898년)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 ‘대장 김창수’(2017)에서는 김구가 경인선 건설 현장에 동원됐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영화 속 김구가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건설 현장에서 부른 노동요는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난 못 살겠네 흥”이라는 가사의 민요 ‘인천아리랑’이다.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 광장에는 ‘한국철도 탄생역’을 알리는 모갈 증기기관차 조형물이 있다. /경인일보DB
다시 인천역에 가보자. ‘최초’라는 타이틀을 빼고 나서도 많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근대 인천의 상징’이 예전처럼 소박하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풀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Scene 2. 월미도 대규모 위락시설 탄생
Scene 3.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 극복
이렇게 중요한 역, 완벽 소화한 인천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경인선 인천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출발지다. 1899년 릴짱릴게임 9월18일 아침 인천에서 떠난 여섯 량짜리 모갈(Mogul) 증기기관차가 오전 9시 10분 노량진에서 내외국인 승객 수백 명을 태우고 출발해 10시 40분께 인천역에 도착했다. 이날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내빈들은 식사를 마친 뒤 오후 1시 10분 열차로 떠나 2시 40분께 다시 영등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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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9월 18일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 /인천시립박물관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 개통식 ‘최초 타이틀’ 영광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서울까지 1시간 40분… 개항장 호텔들은 역사속으로
항만도시에 부여된 관광 이미지 ‘월미도유원지’ 성황
일제 횡포 온몸으로 받아낸 백성들의 쓰린 고통 간직
현재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으로 가면 안내판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철도’ 개통 순 야마토무료게임 간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감흥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27년 전 거대한 쇳덩이가 사람과 화물을 잔뜩 싣고 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철길을 달렸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의 충격을 오늘날 우리가 헤아리기는 어렵다. ‘최초의 철도’라는 역사 정도만 갖고 인천역을 찾는다면 소박한 역사(驛舍)의 모습에 십중팔구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다행 온라인야마토게임 히 우리는 그때의 인천역을 상상할 수 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편 소설 ‘철도원 삼대’(창비·2020)에서 경인철도 개통 이후 열차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 각종 자료를 응축해 주인공 이백만의 입을 빌려 이렇게 썼다.
“그게 말이야, 거시기니 쇳덩이가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가다니! 말도 자전거도, 인력거는 더욱이나 상대도 안 될 거다. 어찌나 빠르던지 고개를 숙였다 들어보니 순식간에 지나가선 다리가 텅 비어있더란 말이지.” (‘철도원 삼대’ 중에서)
이백만이 7년 전(1900년) 지어진 한강철교를 건너는 경인선 열차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강화도 소작농 집안 출신 이백만은 철도에 매료돼 경인철도 선반부에 예비 고원으로 입사한다. 이후 이백만의 삶은 경인선을 달린 증기기관차에 올라탄 것처럼 빠르게 근현대사를 질주한다. 1883년 제물포 개항과 개항장 조성으로 인천은 근대 문물을 만나게 된다. 개항 16년 후 철도가 뚫리면서 비로소 인천은 ‘근대’(Modern)라는 시대를 온몸으로 맞게 된다. 시간 개념부터 송두리째 바뀐다.
경인선 개통 전 인천에서 서울까지 약 100리 길을 가려면 말을 타거나 걸어야 했다. 꼬박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김상열 인천도시역사관장이 쓴 인천시 민속조사 보고서 ‘모든 것은 역에서 시작되었다’(국립민속박물관·2018)를 보면,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는 조선에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불렸으나, 매우 좁고 거칠었다. 조랑말의 등 양쪽으로 두 개의 짐을 얹거나 지게로 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개항기 인천 개항장 조계 일대에 스튜어드호텔, 조선호텔, 대불호텔 등 서양식 호텔이 성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천~서울 간 근대적 교통 수단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제물포항으로 당도하면 인천에서 꼭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개항장 호텔들은 경인선 개통 이후 인천~서울 간 이동 시간이 1시간 40분으로 단축되자 경영난을 겪다 서서히 문을 닫았다.
김상열 관장은 앞선 책에서 “배가 제물포항으로 지구상의 모든 물산을 집결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기차는 제물포에 있는 것을 경성을 비롯한 조선 각지로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경인선 개통 당시 승객들이 열차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 /인천시 제공
경인선이 인천~서울 간 거리만 좁힌 게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새벽닭 우는 소리, 해가 뜨고 지는 변화로 시간을 짐작하며 생활했다. 시간은 딱 맞아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이 적힌 열차 운행 시간표는 시간을 명확히 규정하고 통제했다. 김지환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가 쓴 ‘모던 철도’(책과함께·2022)를 보면, 1899년 9월 개통 당시 경인선은 매일 오전 7시 인천역에서 출발해 7시 6분 유현(현 동인천역), 7시 11분 우각동(현 도원역 인근), 7시 36분 부평, 7시 50분 소사, 8시 15분 오류동, 8시 40분 노량진 순으로 운행했다.
김지환 교수의 앞선 책에 따르면, 19세기 말 주한 미국 공사를 지내며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이 열린 인천 우각동 인근에 ‘알렌 별장’을 짓기도 한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기차는 양반이라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양반의 종이 요청하더라도 늑장부리지 않는다. 기차가 곧 훌륭한 교육자 역할을 하게 됐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국어 교과서에서도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규율을 철도를 통해 교육했다. 경성역 앞에 동경표준시를 가리키는 시계탑이 세워지면서, 한국인은 모든 일상을 그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됐다.
“원산을 우구려 가깝게 하고/ 근산에 뻗치어 멀게 하면서/ 우렁찬 기적을 울리는 철마/ 어언 듯 제물포에 다다랐도다”
‘경인철도가’(京仁鐵道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경인선 개통 이후 서울에서 인천까지 열차를 타며 느끼는 감정을 담았다. 근대적 문명의 속도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인천의 역사 속 음악을 발굴·고증하고 있는 음악단체 ‘인천 콘서트 챔버’가 이 곡을 되살려 2021년 발매한 음반 ‘인천근대양악열전’에 수록했다. 주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나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철도는 항만도시 인천에 ‘경인철도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관광도시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1905년 부산~서울 간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부산~서울을 연결하는 경로가 생겼고, 서울에서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까지 철도가 연결됐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접 운영하던 경인선은 191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위탁됐다. 일종의 민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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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인천역과 연계한 월미도 관광 개발에 나섰다. 인천역 인근에서 월미도까지 1㎞ 구간에 돌제(바다 밑 모래의 이동을 막기 위한 구조물)를 쌓아 도로를 만들었고, 인천역과 월미도를 오가는 셔틀(합승차)을 운행했다. 1922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월미도 북쪽 2천500평 부지에 르네상스식 2층 건물에 욕장을 갖춘 대규모 위락시설을 조성했다.
이듬해 지역 유지들이 모인 월미유원회사는 월미도 6천500평 부지를 인천부로부터 대여받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욕장보다 더 규모가 큰 실내 조탕, 야외 풀장과 해수욕장 등을 갖춘 위락시설을 만들었다. 동물원, 식물원도 생겨났다. 하루 3~6회 운행하던 경인선은 1924년 9회, 1929년 14회까지 운행 횟수를 늘렸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38~1939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박명’에는 인천역을 거쳐 가는 월미도 풍경이 자세히 담겼다.
“난간에서 바로 내려다뵈는 푸울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목욕도 하고 헤엄도 치는데, 특별히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서 목욕을 하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푸울의 얕은 편으로 몇 쌍의 청춘 남녀가 섞이어서 멱을 감는다고 하느니보다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박명’ 중에서)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 (‘철도원 삼대’ 중에서)
철도라는 근대의 양면성을 압축한 황석영의 문장이다. 1896년 조선 정부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받아 낸 미국인 사업가 모스(James Morse)는 공사 중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1899년 1월 일본이 설립한 경인철도 인수조합에 사업권을 완전히 넘겼다. 일본은 경인선을 비롯해 경부선, 경의선 등을 차례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민간인의 토지를 헐값에 수용해 일본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들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살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철도원 삼대’ 중에서)
황석영의 이 소설 속 문장은 실제로 자행된 역사다. 김지환 교수의 앞선 책을 보면, 경부선과 경의선이 부설되면서 약 2천만 평의 토지가 철도 부지로 수용됐고, 연인원 1억 명이 부설 노동자로 동원돼 강도 높은 노역에 시달렸다. 인천~서울 간 경인선 부설은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2024년 10월 허종식(민·인천 동구미추홀구갑) 국회의원실이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소장 자료인 ‘보스트웍 문건’ 속에서 발굴한 경인선 건설 현장 사진(2024년 10월 25일자 1·8면 보도)에서 당시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범 김구(1876~1949)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에 투옥됐을 때(1896~1898년)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 ‘대장 김창수’(2017)에서는 김구가 경인선 건설 현장에 동원됐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영화 속 김구가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건설 현장에서 부른 노동요는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난 못 살겠네 흥”이라는 가사의 민요 ‘인천아리랑’이다.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 광장에는 ‘한국철도 탄생역’을 알리는 모갈 증기기관차 조형물이 있다. /경인일보DB
다시 인천역에 가보자. ‘최초’라는 타이틀을 빼고 나서도 많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근대 인천의 상징’이 예전처럼 소박하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풀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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