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상간변호사 [책과 삶]당신의 초능력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면

2026.02.10 15:27 13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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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상간변호사 천쓰홍의 ‘장화현 삼부작’ 마지막현대와 전근대가 교차하는 시골‘초능력 세 자매’의 인생 소용돌이
대만 중서부에 위치한 장화현의 바닷가 마을 셔터우. 열대 과일인 구아버 농장과 양말 공장이 많아 ‘사장’이 많다고 유명했던 곳이었으나, 양말 수출이 시들해지며 공장이 대거 문을 닫고 마을도 점차 활기를 잃는다. ‘샤오’ 성씨를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기도 한 이곳에 마을처럼 늙어버린 세 자매가 산다.
1호, 2호, 3호로 불리는 이들은 각기 다른 영험한 능력을 가졌다. 1호는 타인의 미래를 점치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다. 2호는 인간의 몸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냄새를 통해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아챈다. 3호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문제는 이 같은 능력을 통해 누군가를 살리거나 도울 수 없다는 데 있다. 1호는 누군가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스스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외칠 뿐이다. “염병할, 누군가가 죽을 거야. 안 들려? 누군가 죽을 거라고. 네가 아닐 거라곤 장담 못해. 샤오씨 여자야.”
<셔터우의 세 자매>는 대만의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 천쓰홍이 자신의 고향인 장화현의 시골 마을 용징, 위안린, 셔터우를 배경으로 해 집필한 ‘장화현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는 앞서 <위층의 좋은 사람>으로 위안린을 <귀신들의 땅>으로 용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귀신들의 땅>은 2020년 대만 양대 문학상인 금장상 문학도서부문상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2023년 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인기를 모았다. 작가는 장화현을 지나는 열차가 위안린역에서 용징역 그리고 셔터우역으로 이어지는 데서 삼부작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천쓰홍의 작품에서 시골은 대만 특유의 토속적인 문화와 신앙을 간직한 특별한 공간이지만,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지 못하고 차별과 억압을 세습하는 불완전한 곳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세 자매의 할아버지는 대만에서 무당과도 같은 존재인 ‘계동’이었다. 영력을 지니지 않았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전통을 물려받아 계동으로 활약했으나, 오히려 특유의 영력을 지닌 세 자매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계동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한다.
옛것과 새것이 불안하게 교차하는 시골이라는 공간에서 세 자매의 이야기가 기이하고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신탁 아래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소리 내지 마. 듣고 싶지 않단 말이야. 신탁 아래로 기어들어 가고 싶지 않다고, 지금은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이 와중에 미국의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마을의 향장이었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와 향장 자리를 물려받은 샤오다웨이는 마을을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만들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셔터우에서 진행하는 온갖 행사를 모아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슈퍼 토요일’을 구상하며 향장을 넘어 장화현 현장으로의 더 큰 꿈을 꾼다. 다만 샤오다웨이의 번드르르한 말들을 시골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같은 샤오씨지만 마을 사람들은 향장인 샤오다웨이를 자신들과 구분해 ‘고급 샤오씨’라 부른다. 집성촌이라는 전통도 시대의 변화와 자본의 역습 앞에 와해돼 있을 뿐이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만 ‘동지(同志) 문학’의 주요 작가답게 천쓰홍은 이번 책에서도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번에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에 집중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들조차 이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드러낸다. 대만은 2019년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지만,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과거에 비해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는데 화요일에 시작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에 끝난다.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슈퍼 토요일’ 당일 세 자매가 한자리에 모인다. 인생의 소용돌이를 돌아 만난 자매들이 함께 겪어낸 고통과 회환 등이 휘몰아친다.
작가는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시골은 거칠고 재미가 없다. 사람들이 죄다 외지로 빠져나가고 풍경도 거의 변한 게 없다’며 ‘무료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잘된 일이다. 나의 관심과 시선을 끄는 건 가장 평범한 사람들과 가장 평범하고 담담한 땅의 모습이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이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중앙정부에서 무슨 사업으로 얼마를 받아왔다는 현수막을 다는 일이다. 때로는 군청이 받은 사업까지 마구 넣어서 눈총을 받지만, 현수막의 효과인지 201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의원생활을 하고 있다. 현수막만 보면 매년 수백억원 이상의 사업들이 진행되는데, 왜 가게는 문을 닫고 사람들은 지역을 떠날까?
권한과 예산이 마법 지팡이일까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권한과 예산을 넘겨주면 비수도권이 살아날까? 지금 초광역권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2006년에 최초의 특별자치도가 된 제주도의 지난 20년을 잘 분석하면 좋겠다. 출범 당시 2조원대였던 제주도의 예산은 매년 늘어나 2025년에 7조5000억원 규모가 되었으니 3배 이상 재정이 늘어난 셈이다. 도지사의 권한도 강해졌다. 국제자유도시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규제가 완화되고 기업에 대한 세금도 감면되고 특별개발우대사업과 제주투자진흥지구,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공공기관 이전 등이 추진되었고 도지사가 이를 관할했다.
그 덕인지 제주도의 인구는 2006년 56만명에서 2023년에 70만명을 넘어섰다.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도 2006년 약 7조원에서 2024년 약 27조원으로 늘어났다. 고용률도 2006년 60% 중반에서 2025년 70% 초반대로 올라갔고, 산업구조도 1차 산업과 영세 자영업에서 관광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겉모습만 보면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보장”해서 “도민의 복리증진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특별법의 목적이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양적 팽창 이면에는 분명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권한을 넘겨받은 제왕적 도지사를 민주적으로 견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의회가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일찌감치 증명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할 시민들의 견제도 2009년에 제주도지사 주민소환운동이 투표율 미달로 개표조차 못하면서 불가능해졌다. 영리병원, 제2공항, 휴양단지, 국제학교, 난개발 등이 계속 갈등을 일으킨 건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무관하지 않고, 이런 논란만큼 제주도 지방공무원들의 비위징계 비율도 높아졌다. 행정체계의 개혁이 동반되지 않아 기초자치제가 폐지되지 않았더라도 주민자치가 강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질은 낮아졌다. 생태계 파괴로 농어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관광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비정규직, 임시직만 늘려서 일자리의 질을 악화시켰다. 제주도의 비정규직 비율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이고, 상용근로자의 평균 월급도 전국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인구가 늘어나면서 내부의 불균등발전과 쓰레기 처리, 교통체증 같은 도시 문제들도 심각해졌고, 그러면서 제주도를 떠나는 인구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초광역권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악마의 맷돌만 돌리지 마라
물론 제주도는 관광도시라는 특수성을 가지기에 다른 지자체에 무조건 적용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특별자치도에 부여된 권한과 예산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활용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토할 좋은 사례는 될 수 있다. 그러면 문제는 가설이 아니고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가 된다.
지난 20년의 경로를 검토하는 것은 추상적인 논쟁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가 하면 다르다는 식의 낡은 상투어 대신 실질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단체장과 관료들의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과 제도, 늘어날 예산을 첨단산업과 개발만이 아니라 1차산업과 시민안전, 노동복지에 사용할 방법, 초광역권 내부의 불균등발전과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개혁 방안들이 제시되어야 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는 환영하지만 부작용을 알고 있음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정치인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대안을 찾으며 다른 경로를 찾을 수 있는 주제들이 지금은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다.
칼 폴라니는 블레이크의 시구를 인용해 자본주의가 사회와 규범을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갈아넣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비판했다. 권한을 가져오고 예산만 따오면 문제가 알아서 해결될 것처럼 환상만을 부추기며 주민들을 찬반의 소용돌이로 밀어넣는 지금의 현수막 정치의 폐해도 그에 못지않다.
1.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가 결국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다는 이야기이다.
끔찍한 운명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영웅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쳐서 그 공로로 테바이의 왕이 된 걸출한 존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테네의 장군 소포클레스는 대체 왜, 다른 나라 왕실의 오래전 이야기를 자기 나라의 주권자 시민들 앞에 내놓은 것일까. 이 맥락이 지닌 몇 겹의 아이러니 속에는 민주주의의 본성과 문화의 운명이 감싸여 있다.
2.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 접하게 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 비참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그는 저주받은 자기 운명을 알게 된 후로 그것을 피하려 기를 써서 노력했다. 자기가 자라난 땅 코린토스를 떠나 이국땅 테바이로 옮겨간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자기가 테바이의 왕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비극의 초입에서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묻는다.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가 누구냐. 국왕 시해자를 찾아서 응징을 해야 테바이에 창궐한 역병을 물리칠 수 있는 까닭이다. 범인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사실이 첫 번째 아이러니다. 그가 죽인 사람이 테바이의 선왕이며 자기 부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모친이자 부인이었던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그는 두 눈을 찔러 스스로를 처벌한다.
이 사태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어둠 속에 있어야 할 한 사람의 운명이 백일하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저주받은 운명을 알게 된 부모는 자식을 버렸고, 친부모를 모르는 채 자라난 자식은 운명을 향해 다가간다. 운명을 피하려 했던 길이 역설적이게도 운명을 향해 가는 길이 되어버린다. 천기누설이 없었다면 사태가 바뀌었을까. 운명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루어질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극작가 소포클레스 자신은 이 참담한 사태에 대해 오만의 결과라고 책망한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이라고, “정의의 여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상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행동이나 말에서 교만의 길을 걷는 자가 있다면, 불운한 교만 때문에 사악한 운명이 그를 잡아갈지어다”라고. 영웅들의 비극적 흠결인 ‘오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이런 비난은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산중에서 마주친 낯선 일행들과의 싸움과 그로 인해 빚어진 살인은 정당방위였고, 홀로 된 왕비와의 결혼은 왕이 되기 위한 합당한 절차였다. 그들이 친부모인 줄 알았더라면 결코 생길 수 없는 일들이었다. 오이디푸스의 오만이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천하의 소포클레스가 이만한 이치를 몰랐을까.
3.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유랑에 지친 늙은 맹인 오이디푸스는 자기 처지의 부당함에 대해 항변한다. 요컨대 오만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식으로 오이디푸스를 비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음을, 소포클레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의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우선, 32년 동안 아테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민주정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진짜 대상으로 꼽아볼 수 있지 않을까.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장군으로 참여했던 소포클레스는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에게, 폭군이 되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겸손해야 한다고, 지도자의 오만과 무지성과 태만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나락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코러스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소포클레스가 활동했던 고전 비극의 절정기는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바야흐로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던 때이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국들을 속국화함으로써 제국이 되었고, 전통의 최강국 스파르타는 새로 부상한 해양 강국 아테네를 견제하려다 마침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두 나라는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아테네의 적국이었던 오이디푸스왕의 나라 테바이는 어부지리를 얻는다. 페르시아 전쟁 때는 페르시아 편이었고, 스파르타와의 전쟁 때는 스파르타 편이었던 나라가 테바이였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은 우리 역사로 치면, 신라 왕실의 비극 이야기를 백제 사람들이 연극으로 올려놓고 즐기는 형국이니, 찬탄과 조롱 사이를 오가는 아이러니의 기운이 선연하지 않을 수 없다.
<오이디푸스 왕>을 둘러싼 역사·정치적 맥락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문화적 업적을 생산해내는 민주주의 체제의 탁월한 힘이다. 토론과 언설이 힘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와 역량이 문화와 사상의 수준을 고양시킨다. 스파르타와 테바이, 코린토스 같은 당대 강국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는 찬란한 문화의 힘을 보여준 유일한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이다. 아이스킬로스에서 소포클레스를 거쳐 에우리피데스로 이어지는 고전 비극의 거장들은 모두 민주정 시기 아테네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그리스 비극’이라는 용어는 ‘아테네 비극’이라는 말로 수정되어야 사실에 부합한다. 희극의 대가 아리스토파네스도 마찬가지이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상사의 천재들도 마찬가지이다. 아테네의 경제력과 문화적 개방성, 그리고 민주주의의 힘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모두 생겨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4.
그런데 페리클레스가 오만했다고? 그의 시대 아테네 역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제도인지를 알려준다. 민주정의 힘이 있어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생겨났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것도 민주정의 결실인 아테네 시민 법정이다. 시민들의 집단 지성은 페리클레스를 지도자로 옹립하여 국력의 최전성기를 구가했지만, 또한 호전적 선동가 클레온과 매력적인 용모의 청년 매국노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의 총애를 받던 제자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편에 붙어 아테네를 패전과 쇠락으로 몰아넣었다)를 지도자로 선출한 것 역시 민주정의 주권자 시민 집단이었다.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언제나 민주주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이라는 소포클레스의 대사가 누구를 겨냥하는 것인지 좀 더 분명해지는 것이 아닌가. 오만이란 언제나 힘세고 잘난 존재, 주권자에게서 생겨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전사자들을 위한 장례 연설에서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의 적으로 경고한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었다. 안정된 실체로서의 민주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반민주적 요소들을 적발하고 밀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는 역량이 민주주의 본질이다. 민주정의 주권자는 불개미 떼와 같아서 뭉치면 강력하지만 길을 잃기 쉽다. 그러니까 페리클레스와 소포클레스는 입을 모아서 주권자 시민들을 향해 오만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소포클레스가 말하는 오만은 페리클레스의 언어로는 정치적 무관심에 상응하거니와, 그것은 곧 세상을 망가뜨리는 무지성이자 주권자를 백치화하는 정치적 나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집단 정동에 취약한 체제이다. 하지만 둔하고 실속 없어 보이더라도, 자기가 만든 절차를 지켜내는 주권자의 자기 존중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요체가 된다.
이런 사태를 고요히 지켜봐온 늙은 맹인 오이디푸스라면, 2026년 2월 대한민국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노심초사하면서, 때로는 생업을 미뤄둘 만큼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보낸 지난 1년여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제 안다. 합법적 절차를 위한 집단적 인내와 응시의 시간이, 또한 답답하고 괴로웠던 순간들의 거대한 집적과 꿈틀거림이 우리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어 있음을 이제 느낀다. 그런 마음의 에너지야말로, 또한 그로부터 발원한 시민들의 행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켜내는 진짜 힘이라는 것을, 새들도 벌레들도 이제는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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