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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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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할 수 없는 안쪽.
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바깥.
라시드(가명·74)가 노인종합복지관 3층 체력단련장에서 바라보는 맞은편은 ‘눈앞의 먼 곳’이었다. 복지관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경계’가 끝 모르게 뻗어 있었다.
“최고 노른자 땅”에 “미니 신도시”를 짓는 “단군 이래 최대 재개발”(2003년 서울 용산구 111만㎡에 한남뉴타운 지정)이 본격화되면서 사업 릴게임온라인 을 따려는 시공사들이 “전쟁”과 “빅매치”를 벌인 “독보적 대장주”.
펜스로 둘러싸인 땅덩어리 위로 언론과 부동산업계가 20년 넘게 뿌려온 거대한 말들이 수북했다. 개발과 재개발은 ‘도시 정비’란 이름으로 가난한 자리를 지우며 나아가는 ‘발전’이었다. 현재를 부숴 미래를 잡으라는 ‘발전의 언어들’ 속에 현재와 함께 부서지는 존재들의 미래는 신천지릴게임 끼어들 틈이 없었다.
30년이었다. 라시드의 한국살이가 올해로 그 햇수를 꼭 채웠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은 그에게 늘 들어설 수 없는 ‘먼 곳’이었다. 모국에서 부서진 삶을 한국에서 다시 맞추려 했지만 그의 현재와 미래는 정비되지도 재개발되지도 않았다.
“잘 지내셨어요?”
운동을 마치고 내려온 라 릴게임추천 시드에게 김종철(공익법센터 어필)이 인사했다. 라시드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반겼다.
“안녕하세요. 내 변호사. 죽을 때까지 내 변호사.”
두 변호사가 손을 맞잡았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한국에 온 파키스탄인 변호사와 17년 동안 그를 도와온 한국인 변호사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나, 무서워요.”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첫마디가 그랬다.
라시드. 1952년 파키스탄 라호르 출생. 1977년 대학 졸업 뒤 법률 사무소 수습 시작. 1983년부터 변호사로 일하며 안정된 생활 영위. 1996년 정당의 지역 대표로 선출.
결혼은 23살에 했다. 상대는 누나 남편의 여동생이었다. 관계가 얽히면 딸의 눈물이 줄지 모른다고 아버지는 쿨사이다릴게임 기대했다. 사위에게 학대당하는 딸을 두고 볼 수 없어 아들이 원치 않는 결혼을 밀어붙였다.
라시드를 결혼시키기 전부터 아버지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살 무렵부터 라시드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딸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아들의 고통을 외면했으나 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라시드를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라시드는 ‘표적’이 됐다. 가까운 이웃집 남성이 그를 집으로 불렀다. 성행위를 유도하며 동의 없이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다. 거절하자 남자는 라시드의 남동생에게 사진을 보냈다. 가족 모두가 “적”이 됐다.
라시드는 4남5녀 중 차남이었다.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매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들끼리 차지하려고 했다. 그는 항의했고 형제들은 “복수”했다. 경찰에게 라시드가 게이라고 신고했다. 이웃 남자가 찍은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파키스탄에서 동성애는 반이슬람으로 규정됐다. 형법은 동성애자를 징역형이나 종신형에 처했다. 종교법(샤리아)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신의 뜻’을 칼처럼 쓰는 인간 세계에선 변호사인 그도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동생들이 라시드를 묶고 쇠뭉치로 머리를 후려쳤다. 손도 자르려 했다. 피를 많이 흘렸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사람이란 현실이 가장 끔찍했다. 경찰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파키스탄에 남아 있으면 그는 누구에게든 살해될 수 있었다. 한국행(1996년 12월24일 입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베리 배드(Very bad).”
2022년 10월29일을 떠올릴 때마다 라시드의 입에선 그 말이 나왔다. 서울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질식해 가는 청년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오래 의탁해온 도시가 순식간에 죽음의 현장으로 변했다. 안전할 거라 믿었던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날의 참사로만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무서우세요?”
파키스탄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며 김종철이 물었다. 라시드가 안내한 식당은 이슬람사원(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과 인접해 있었다. 사원 앞길은 재개발구역의 북서쪽 경계였다. 경계가 된 길을 매일 오르내리면서도 라시드는 사원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그는 한국의 무슬림 사회로부터도 공격받았다. 동성애자로 ‘아우팅’되면서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폭행당했다. 한 스리랑카인은 라시드의 눈이 불량하다며 주먹을 휘둘렀다. 모스크에서 설교 중인 이맘을 성적인 시선으로 본다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파키스탄 지인들은 사원을 떠나지 않으면 그가 게이란 사실을 퍼뜨리겠다고 위협했다. 위험을 피해 먼 나라로 왔지만 위험도 그를 놓치지 않고 쫓아왔다. 라시드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했다. 그는 “내가 나란 이유로 모욕받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먹어봐요.”
라시드가 커리 접시를 김종철 앞으로 밀었다. 그는 ‘평생 변호사’ 김종철과 2009년 처음 만났다. 그해 1월 미등록 체류 단속반에 체포돼 외국인보호소에 갇혔다. 라시드는 파키스탄으로 강제송환 되면 살해되거나 박해당할 거란 공포로 떨었다. 함께 수감돼 있던 이란인이 명함 한장을 건넸다. 한국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도 이란으로 추방 땐 생명이 위험했다. 그가 “나를 도와주는 변호사”라며 연락을 권한 사람이 김종철(그의 도움으로 이란인은 9년 만에 난민 인정)이었다.
김종철의 조력을 받아 라시드는 법무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근거 없는 공포’라며 불허(2009년 6월)됐다. 소송을 제기했고 반년 뒤 승소했다. 법원은 ‘근거 있는 공포’라고 봤다. 공포의 근거가 판단 기관에 따라 없다가 있다가 했다. 그는 한국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은 첫 사례였다. 기뻤지만 기쁨을 표현하진 못했다. ‘난민 됨’을 밝히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임을 노출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 심장, 걱정 많아요.”
라시드의 불안은 현재형이었다. 난민으로 사는 동안에도 위협과 협박은 예고 없이 닥쳤다. “지금도 큰길을 피해 작은길로만” 다녔다. 그는 차라리 ‘한국인’이 되길 바랐다. “한국 국적이나 영주권이 있으면 한국 정부가 보호해줄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이 맞든 틀리든 “죽어서도 돌아갈 곳 없는”(☞16회 ‘집에 가자’) 라시드는 “죽어도 한국에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화 신청(2021년)은 거부됐다. 영주권도 불허(2022년 9월)됐다. ‘불허 취소 소송’ 역시 1심(2024년 7월)과 2심(같은 해 12월), 최종심(지난해 4월)까지 차례로 기각됐다.
자격에도 ‘가격’이 있었다.
불허 근거 중 하나는 소득과 재산 부족이었다. 한국은 영주를 원하는 난민 인정자에게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 또는 전년도 가계 자산 중위 수준 이상’(일반 외국인은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 2배 이상 또는 전년도 가계 자산 중위 수준 1.5배 이상’)을 요구했다. 신청 당시 각각 3777만원과 2억5795만원이었다. 김종철은 상고이유서에 썼다.
“난민 인정자들은 국적국에서 박해 때문에 뿌리가 뽑혀 왔고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리셋(reset·초기화)되어 아무런 인적·재정적·사회적 자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해당 금액은) 대부분의 난민 인정자들에게 죽을 때까지 영주 자격을 취득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입국 뒤 라시드는 의류·금속·식품 공장 등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한국에선 그의 법률 지식도 쓸모없었다. 나이 들고 무릎과 눈이 고장 나면서 더는 고용할 만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돈 쓰는 걸 무서워했다. 30년간 극도로 절약하며 모은 전 재산은 4800만원이었다. 그에게 ‘한국인의 자격’은 너무 비쌌다.
“아이고 아이고.”
이슬람사원 뒤 언덕 계단에서 라시드가 가쁜 숨을 쉬었다. 불편한 다리 탓에 한발씩 느리게 떼고 옮겼다. 그의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통증을 호소하는 감탄사만큼은 한국어로 튀어나왔다. 계단 끝에 막다른 골목이 있었다. 낡은 단독주택 옆에 붙은 한칸짜리 가건물이 그의 월셋집이었다. 창고로 지은 듯한 공간에 시멘트를 바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가스와 수도는 넣었어도 화장실은 넣지 못한 집은 쪽방에 가까웠다. 햇빛 드물고 습기 풍부한 그 방에서 라시드는 15년을 살았다.
“알라시여.”
모스크를 찾진 않았으나 신에게 기도하길 멈추진 않았다.
“제게 죽음을 주세요.”
무슬림에게 목숨을 끊는 행위는 죄악이었다. “모욕을 견딜 수 없어 죽고 싶지만 죽어서까지 모욕당하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 포기하지 못하니 제발 당신이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그 황망한 기도를 김종철에겐 숨기지 않았다. ‘내 변호사’를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라시드가 기도하듯 꺼냈다.
“명예 국적(honorary nationality)이라도….”
‘명예’엔 법적 효력이 없는 줄 그도 알았다.
“안 되겠어요?”
안 될 줄도 알았지만 “그거라도 있으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계단 아래에서 겨울 도시의 표정이 차가웠다.
이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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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를 결혼시키기 전부터 아버지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살 무렵부터 라시드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딸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아들의 고통을 외면했으나 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라시드를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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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의 조력을 받아 라시드는 법무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근거 없는 공포’라며 불허(2009년 6월)됐다. 소송을 제기했고 반년 뒤 승소했다. 법원은 ‘근거 있는 공포’라고 봤다. 공포의 근거가 판단 기관에 따라 없다가 있다가 했다. 그는 한국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은 첫 사례였다. 기뻤지만 기쁨을 표현하진 못했다. ‘난민 됨’을 밝히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임을 노출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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