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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살에 시를 쓰다
1592년(선조 25)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다. 곡성 옥과 출신의 유팽로가 그다. 그가 ‘진동장군’이라 칭하며 의병을 일으킨 날은 1592년(선조 25) 4월20일이었다. 4월22일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보다 2일이 빨랐다. ‘진동’(鎭東)이 ‘동쪽(일본)을 진압하다’의 뜻이니, 기개가 대단하다.
유팽로(柳彭老, 1552-1592)는 1552년(명종 7)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 마을에서 유경안과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본관은 문화(文化), 릴게임한국 자는 형숙(亨叔) 또는 군수(君壽)였고, 호는 월파(月波)다.
유팽로를 모신 사당 ‘도산사’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오늘 합강 마을에는 그의 생가 오션파라다이스게임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제일 위쪽, 그를 기리는 도산사(道山祠) 바로 곁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에 오른 유민수는 그의 선조이고, 부친 유경안은 정3품 어모장군에 오른 인물이다. 선조인 유민수도, 부친인 유경안도 무인 출신이었다. 유팽로가 전국 바다이야기게임2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음도 가문의 무인 기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유팽로는 글 짓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가 6살에 지은 시가 남아 있다.
6세 때 지은 시를 새긴 시비
릴게임
“전유합강수(前有合江水) 후유옥출산(後有玉出山) 원차강산수(願借江山壽) 단욕열친안(但欲悅親顔)”이 그것이다. “앞에는 합강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옥출산이 있다네. 바라건대 강과 산의 수명을 빌려, 다만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자 할 뿐”이라고 해석된다. 시의 핵심은 어버이에 대한 ‘효 릴게임신천지 ’다. 합강은 옥과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지점의 강 이름이고, 옥출산은 옥이 많이 나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합강 마을 뒷산 이름이다.
어렸을 때 신동 소리를 들었던 유팽로는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한 후,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받은 관직이 종9품 홍문관 부정자였다.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부친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 10여 일 전인 1592년(선조 25) 4월2일, 정7품 홍문관 박사에 다시 발탁된다. 그러나 왕의 잘못까지 거침없이 비판한 상소를 올리자, 미워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았고, 종9품 성균관 학유(學諭)로 좌천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만난다.
유팽로를 기린 마을 벽화 (옥과면 합강리)
-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유팽로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집 뒷산인 옥출산에 3칸의 집을 지어 무기와 곡식을 비축해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남긴 ‘월파집’의 ‘상소’ 편에 “남쪽에 난리가 일어날 것을 알고 미리 방비를 갖춰야 한다고 했지만, 여러 소인배에게 거슬려 성균관 학유로 쫓겨나게 됐다”는 기록 등 세 번 올린 상소가 참고가 된다.
왜란이 발발하자 관군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팽로는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고, 백성 중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유팽로가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오는 중 순창 대동산에서 500여 명의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이들은 조정의 실정과 수탈로 인해 떠돌아다니던 부랑자들로, 목숨이나마 부지하기 위해 인근 읍성을 점령해 왜군에게 바치려는 일종의 반란 세력이었다.
유팽로는 부랑자 무리 앞에 선다. 그리고 대의와 불의, 옳고 그름에 대해 연설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니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자”고 설득, 의병으로 규합한다. 유팽로는 그 자리에서 의병을 결성하고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쓴 푸른색 깃발을 세운다.
유팽로가 부랑자 세력을 규합해 의병에 합류시켰음은 그가 남긴 ‘월파집’의 “대동산 앞뜰에 이름 없는 군사들이 있어 알아보니 여러 고을의 부랑배들이었다”는 기록과 “청기(靑旗)를 세우고 쓰기를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썼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다 유팽로 의병은 부랑자 500명에, 집안에 딸린 식구 100여 명이 더해진다. 600여 의병을 모은 유팽로는 남원 출신의 양대박 안영 등 21개 읍 61명의 사림과 유생과 함께 담양 추성관에서 회합한다. 이 회합에서 고경명이 만장일치로 의병장에 추대된다. 곧이어 추성관에 의병청이 설치되고 총대장 고경명, 좌부장 유팽로, 우부장 양대박, 종사관 안영을 지휘부로 하는 6천여 명의 호남의병이 결성된다. 고경명군이 이끈 6천 의병은 전국 최대 규모였다.
6월11일 담양 추성관을 출발한 후 금구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을 지키던 군사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에 우부장 양대박은 다시 군사를 모으기 위해 남원으로 향하고, 본진은 전주에 머무르며 군사훈련을 쌓는다.
6월27일, 고경명 부대는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한다. 이때 충청도 황간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고경명은 전주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7월1일, 진산으로 진을 옮긴다.
고경명 부대가 진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금산을 침범해 군수 권종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7월8일 서둘러 금산성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운명의 날 7월10일을 맞는다.
의병대장 고경명과 좌부장 유팽로가 순국하는 모습이 ‘선조수정실록’에 다음처럼 기록돼 있다.
“이튿날(7월10일) 동틀 녘에 다시 방어사(전라도 방어사 곽영)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해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 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다. 고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했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줘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좌부장 학유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했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고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했다.”
18세기 사서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서술은 더 자세하다. “되돌아온 유팽로에게 고경명이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했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軍事)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했다. 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었다. 경명이 드디어 팽로 영 등과 더불어 함께 죽었다.”
나라를 구하고 대장을 지켜내기 위해 온몸으로 적의 칼을 막다 순절하는 모습이 장엄하다.
- 정렬각이 건립되다 유팽로의 순절은 호남인들을 감동시킨다.
고경명 부대가 금산에서 패배하자, 화순에서 담양부사를 지낸 최경회가 고경명 휘하의 군사 800여 명을 모아 거병한다. 이때 최경회 의병에 참여한 도내의 사민(士民, 양반과 상민)들이 본보기로 삼은 분이 유팽로였다.
‘선조수정실록’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 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들이 많이 추종하였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유팽로가 순국하자 선조는 1592년(선조 25) 9월, 종3품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했고, 1623년(인조 1)에는 정3품 승정원 좌승지에 가증한다. 그리고 유팽로의 충절과 부인 원주 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충신’과 ‘열녀’로 정려(旌閭)한다. 당시 왕명으로 건립된 ‘정렬각’이 지금 사당 도산사 밑에 있다.
유팽로와 부인 원주 김씨의 정려를 모신 정렬각
유팽로의 부인 원주 김씨가 열부로 정려를 받은 사연은 이렇다.
유팽로가 죽자, 그의 충성스러운 검은색 말이 많은 창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했음에도 장군의 머리를 물고 300리 밤길을 달려 김씨의 치마폭에 건넨다. 그리고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부짖다 굶어 죽는다. 부인 김씨도 3년 상을 마친 뒤 자결한다. 부인 김씨가 정려를 받은 연유다.
유팽로의 검은 말이 김씨에게 남편의 머리를 갖다 바친 후 울부짖다 굶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말의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말 무덤을 만들어 준다.
유팽로의 시신을 몰고 온 말 무덤 ‘의마총’
오늘 합강 마을 앞, 송전리 내동 마을에 위치한 ‘의마총’(義馬塚)이 그것이다.
유팽로가 남긴 유고집 ‘월파집’(月波集)은 3권 1책으로 구성돼 있는데, 1권에는 시와 상소, 격문이, 그리고 2권에는 ‘유가설’(儒家說), ‘병가설’(兵家說)과 함께 ‘농가설’(農家說)이 실려 있다. 3권은 일기다.
‘유가설’은 중국의 역대 유학자를 논평한 것인데, 유팽로의 멘토는 제갈량과 도연명이었다.
‘병가설’에서는 유학자가 문(文)만 아니라 무(武)도 겸비해야 하고 군사 문제, 무기 문제, 지형지물의 이용, 첩보활동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자주국방을 위한 군비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왜적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군비를 확충해 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런데 유팽로의 글 중 주목되는 것은 옥과 지역 농법에 근거한 농서인 ‘농가설’이다. ‘농가설’은 항목과 조목으로 나눠 일정하게 정리한 ‘농사직설’처럼 체계를 갖춘 농서는 아니었지만, 월별로 농가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지시하는 등 월령식 농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국 최초의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가 남긴 ‘농가서’는 전라도 옥과 지역의 농업 모습을 알 수 있는 지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 지식인의 실천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592년(선조 25)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다. 곡성 옥과 출신의 유팽로가 그다. 그가 ‘진동장군’이라 칭하며 의병을 일으킨 날은 1592년(선조 25) 4월20일이었다. 4월22일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보다 2일이 빨랐다. ‘진동’(鎭東)이 ‘동쪽(일본)을 진압하다’의 뜻이니, 기개가 대단하다.
유팽로(柳彭老, 1552-1592)는 1552년(명종 7)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 마을에서 유경안과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본관은 문화(文化), 릴게임한국 자는 형숙(亨叔) 또는 군수(君壽)였고, 호는 월파(月波)다.
유팽로를 모신 사당 ‘도산사’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오늘 합강 마을에는 그의 생가 오션파라다이스게임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제일 위쪽, 그를 기리는 도산사(道山祠) 바로 곁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에 오른 유민수는 그의 선조이고, 부친 유경안은 정3품 어모장군에 오른 인물이다. 선조인 유민수도, 부친인 유경안도 무인 출신이었다. 유팽로가 전국 바다이야기게임2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음도 가문의 무인 기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유팽로는 글 짓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가 6살에 지은 시가 남아 있다.
6세 때 지은 시를 새긴 시비
릴게임
“전유합강수(前有合江水) 후유옥출산(後有玉出山) 원차강산수(願借江山壽) 단욕열친안(但欲悅親顔)”이 그것이다. “앞에는 합강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옥출산이 있다네. 바라건대 강과 산의 수명을 빌려, 다만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자 할 뿐”이라고 해석된다. 시의 핵심은 어버이에 대한 ‘효 릴게임신천지 ’다. 합강은 옥과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지점의 강 이름이고, 옥출산은 옥이 많이 나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합강 마을 뒷산 이름이다.
어렸을 때 신동 소리를 들었던 유팽로는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한 후,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받은 관직이 종9품 홍문관 부정자였다.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부친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 10여 일 전인 1592년(선조 25) 4월2일, 정7품 홍문관 박사에 다시 발탁된다. 그러나 왕의 잘못까지 거침없이 비판한 상소를 올리자, 미워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았고, 종9품 성균관 학유(學諭)로 좌천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만난다.
유팽로를 기린 마을 벽화 (옥과면 합강리)
-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유팽로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집 뒷산인 옥출산에 3칸의 집을 지어 무기와 곡식을 비축해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남긴 ‘월파집’의 ‘상소’ 편에 “남쪽에 난리가 일어날 것을 알고 미리 방비를 갖춰야 한다고 했지만, 여러 소인배에게 거슬려 성균관 학유로 쫓겨나게 됐다”는 기록 등 세 번 올린 상소가 참고가 된다.
왜란이 발발하자 관군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팽로는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고, 백성 중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유팽로가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오는 중 순창 대동산에서 500여 명의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이들은 조정의 실정과 수탈로 인해 떠돌아다니던 부랑자들로, 목숨이나마 부지하기 위해 인근 읍성을 점령해 왜군에게 바치려는 일종의 반란 세력이었다.
유팽로는 부랑자 무리 앞에 선다. 그리고 대의와 불의, 옳고 그름에 대해 연설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니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자”고 설득, 의병으로 규합한다. 유팽로는 그 자리에서 의병을 결성하고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쓴 푸른색 깃발을 세운다.
유팽로가 부랑자 세력을 규합해 의병에 합류시켰음은 그가 남긴 ‘월파집’의 “대동산 앞뜰에 이름 없는 군사들이 있어 알아보니 여러 고을의 부랑배들이었다”는 기록과 “청기(靑旗)를 세우고 쓰기를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썼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다 유팽로 의병은 부랑자 500명에, 집안에 딸린 식구 100여 명이 더해진다. 600여 의병을 모은 유팽로는 남원 출신의 양대박 안영 등 21개 읍 61명의 사림과 유생과 함께 담양 추성관에서 회합한다. 이 회합에서 고경명이 만장일치로 의병장에 추대된다. 곧이어 추성관에 의병청이 설치되고 총대장 고경명, 좌부장 유팽로, 우부장 양대박, 종사관 안영을 지휘부로 하는 6천여 명의 호남의병이 결성된다. 고경명군이 이끈 6천 의병은 전국 최대 규모였다.
6월11일 담양 추성관을 출발한 후 금구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을 지키던 군사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에 우부장 양대박은 다시 군사를 모으기 위해 남원으로 향하고, 본진은 전주에 머무르며 군사훈련을 쌓는다.
6월27일, 고경명 부대는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한다. 이때 충청도 황간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고경명은 전주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7월1일, 진산으로 진을 옮긴다.
고경명 부대가 진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금산을 침범해 군수 권종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7월8일 서둘러 금산성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운명의 날 7월10일을 맞는다.
의병대장 고경명과 좌부장 유팽로가 순국하는 모습이 ‘선조수정실록’에 다음처럼 기록돼 있다.
“이튿날(7월10일) 동틀 녘에 다시 방어사(전라도 방어사 곽영)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해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 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다. 고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했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줘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좌부장 학유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했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고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했다.”
18세기 사서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서술은 더 자세하다. “되돌아온 유팽로에게 고경명이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했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軍事)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했다. 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었다. 경명이 드디어 팽로 영 등과 더불어 함께 죽었다.”
나라를 구하고 대장을 지켜내기 위해 온몸으로 적의 칼을 막다 순절하는 모습이 장엄하다.
- 정렬각이 건립되다 유팽로의 순절은 호남인들을 감동시킨다.
고경명 부대가 금산에서 패배하자, 화순에서 담양부사를 지낸 최경회가 고경명 휘하의 군사 800여 명을 모아 거병한다. 이때 최경회 의병에 참여한 도내의 사민(士民, 양반과 상민)들이 본보기로 삼은 분이 유팽로였다.
‘선조수정실록’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 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들이 많이 추종하였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유팽로가 순국하자 선조는 1592년(선조 25) 9월, 종3품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했고, 1623년(인조 1)에는 정3품 승정원 좌승지에 가증한다. 그리고 유팽로의 충절과 부인 원주 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충신’과 ‘열녀’로 정려(旌閭)한다. 당시 왕명으로 건립된 ‘정렬각’이 지금 사당 도산사 밑에 있다.
유팽로와 부인 원주 김씨의 정려를 모신 정렬각
유팽로의 부인 원주 김씨가 열부로 정려를 받은 사연은 이렇다.
유팽로가 죽자, 그의 충성스러운 검은색 말이 많은 창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했음에도 장군의 머리를 물고 300리 밤길을 달려 김씨의 치마폭에 건넨다. 그리고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부짖다 굶어 죽는다. 부인 김씨도 3년 상을 마친 뒤 자결한다. 부인 김씨가 정려를 받은 연유다.
유팽로의 검은 말이 김씨에게 남편의 머리를 갖다 바친 후 울부짖다 굶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말의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말 무덤을 만들어 준다.
유팽로의 시신을 몰고 온 말 무덤 ‘의마총’
오늘 합강 마을 앞, 송전리 내동 마을에 위치한 ‘의마총’(義馬塚)이 그것이다.
유팽로가 남긴 유고집 ‘월파집’(月波集)은 3권 1책으로 구성돼 있는데, 1권에는 시와 상소, 격문이, 그리고 2권에는 ‘유가설’(儒家說), ‘병가설’(兵家說)과 함께 ‘농가설’(農家說)이 실려 있다. 3권은 일기다.
‘유가설’은 중국의 역대 유학자를 논평한 것인데, 유팽로의 멘토는 제갈량과 도연명이었다.
‘병가설’에서는 유학자가 문(文)만 아니라 무(武)도 겸비해야 하고 군사 문제, 무기 문제, 지형지물의 이용, 첩보활동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자주국방을 위한 군비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왜적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군비를 확충해 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런데 유팽로의 글 중 주목되는 것은 옥과 지역 농법에 근거한 농서인 ‘농가설’이다. ‘농가설’은 항목과 조목으로 나눠 일정하게 정리한 ‘농사직설’처럼 체계를 갖춘 농서는 아니었지만, 월별로 농가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지시하는 등 월령식 농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국 최초의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가 남긴 ‘농가서’는 전라도 옥과 지역의 농업 모습을 알 수 있는 지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 지식인의 실천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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